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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nowledge Thief

🧲나영석PD와의 대화록

Jin_x 2023. 4. 3. 14:25

"어차피 레이스는 길다"

'대충찍기' 신공 - 단초의 발견

강호동이랑 유재석이 없어서 안된다고 핑계를 댔었는데, 강호동이 섭외가 됐다. <준비됐어요>는 망할 준비된 듯 잘 안됐고. 새 프로그램 회의를 해야 되는데, 새로운 프로그램이라는게 며칠 만에 뚝딱 만들어지지는 않고. 최소 한두 달은 회의랑 숙성 기간을 거쳐야 나오는 건데, 문제는 그러는 동안 방송을 안 낼 수가 없었다.

 

이럴 때 PD들은 일명 '대충 찍기' 신공을 쓴다. 아무거나, 그야말로 대충 찍으면서 나머지 역량을 회의에 집중. 촬영도 대충, 편집도 슬슬하고, 남는 시간에 무조건 회의. 

 

당시에 꽂혀있던 테마가 '시골'이었다. 연예인 데리고 시골가서 뭐라도 하면 재밌지 않을까하고. 몸뻬입고, 밭갈고,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랑 에피소드 생기면 웃기지 않을까 했다. 멤버들 이름 외우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헤어지기 싫어져서 즙짜는 메타로. 시골 말고 두번째로 매달리던 주제가 '복불복'이었다. '아 나 또 걸렸어. 아싸 나는 통과'하는. 롤러코스터 타기 걸기, 폐교에서 공포체험하기 등. 그렇게 대충 찍으면서 역설적으로 <1박 2일>을 시작할 단초를 발견할 수 있었다.

 

'좋은 프로그램'이 뭘까.

좋은 프로그램이란 뭘까. 좋은 프로그램은 '발명'되는 건가, '발견'되는 건가.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좋은 프로그램이란 다음의 세 가지를 만족시킬 때에야 비로소 만들어진다는 것. 

첫째, '새로울 것'. 둘째, '재미가 있을 것', 셋째, '의미가 있을 것'.

근데 문제는 세 요소가 똑같은 비중의 중요도를 가진 게 아니라는 거다. 셋 중 가장 중요한 것, 가장 우선시 해야할 요소는 바로 '새로워야 한다'는 명제. 뭔가 새로운구석이 하나라도 있어야 시청자들이 비로소 관심을 갖더라. 그 새로움 속에서야 창조된 재미와 의미만이 소구력을 가진다.

 

신기한 건 처음으로 시도되는 뭔가가 있을 때 사람들이 가장 많이 고개를 들어 봤다는 거다. 시청자들은 전문가다. 저게 재미가 있는지 없는지 10초면 결정하고 판단을 내린다 딱 10초. 재미가 있으면 10초 더. 재미가 없으면 다시 하던 걸로. 신기했던 게 그 10초 정도는 대부분의 '점령자'들이 모두 TV를 본다는 것.

 

즉, 새로운 시도가 이뤄지는 한 사람들은 10초 정도의 여유는 언제든지 투자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새롭지 않으면 시청자들은 만화책(지금은 스마트폰일 거다)에서 영원히 고개를 들지조차 않는 다는 거다. 꽤 웃겨서 먹힐 만 한데? 싶은 것에도 "수도 없이 봐왔어, 웃긴 건 알아. 근데 뻔하잖아? 20년 이상 TV 봐왔다고. 작작 좀 해"라고 대답하기도 한다.

 

TV가 처음 보급된 아프리카 오지 작은 부족의 방송국에서 PD했으면 행복했을 건데. "족장님 그거 봤어요? 가위바위보 해서 딱밤 맞는거?"/ "아이고 그 얘기좀 그만해. 한 시간 동안 웃었단 말이야. 그 사우스코리아에서 왔다는 PD한테 물소라도 한 마리 대접하고 싶네" 이런 대화가 있을지도. 재수 없게 TV 보급률 100%에 컬러 TV 역사가 40년 이상 된 나라에서 PD를 하고 있는 거다. 이 나라 사람들은 여름의 연례행사 공포체험은 아무도 안 볼 게 분명.

-- 이제 인구 5천만따리 섬에서만 유통되는 아이디어는 없다. 글로벌 소셜미디어에서 공유해버리면 그만인 걸. 

 

폐가체험에서 지원이의 표정을 보고 잊고 있었던 진실 한 가지를 우리는 '발견'했다. 몰랐던 게 아니다. 복불복으로 실제로 괴로워할 만한 상황, 그 결과가 진짜 두려워서 혹은 진짜 달콤해서 몰입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 너무 비참하거나 눈살이 찌푸려지는 상황은 아닌, 시청자가 재밌게 볼 수 있는 상황이 뭘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좋은 촬영'이 뭘까.

사실 좋은 촬영이라는 건 때때로 그 세세한 내용보다는 촬영희 전체적인 '흐름'이랄까, '기'라는 요소가 상당히 중요하다. 문장으로 표현하기는 꽤 어려운 부분이지만 뭐랄까, 기분좋게 슥슥 넘어가야 좋은 촬영인 것이다. 

 

촬영을 마치고, 제작진이나 등장 인물이나 '뒷맛이 개운한 걸? 뭘 찍었는지도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데 말야. 근데 뭔가 되게 즐거웠어' 이런 식의 반응이 나와야 좋은 촬영인 것이다. 

 

인생이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말이 있는데, 방송 기준으로 바꿔 말하자면, 촬영이 비극적일수록 방송은 희극적인 경우가 많았다. 계획대로 미끈하게 진행되는 여행도 좋지만, 어쩔 수 없는 변수가 생겨 에라 모르겠다 식으로 진행되는 여행이 나는 훨씬 재미있었다. 돌이켜보건대 수많은 난관에 봉착할 때 마다 그걸 해결하면서 우리 나름대로의 스토리를 만들고 사람들에게 대리만족을 줬던 것, 솔직히 즐거웠다.

 

중간에 종민이는 군대로, 상렬이형은 드라마 스케줄로, 홍철이는 무도와 동시촬영으로 건강상의 문제로 빠지게 됐다. 순식간에 3명이 빠졌고, 몇 번의 지루한 회의를 거쳐 김C(얼굴이 야생스럽잖아. 자기는 말을 못한대, 끝날 때까지 한마디도 안할지 모른대. 그냥 서있으라고 했어. 우리가 알아서 하겠다고 했지), 이승기('내 여자라니까'말고 또 있어? 이우정 작가의 평판, 뭐든 열심히 해. 반듯해. 요즘 애들 같지 않아라는 평), MC몽(효과가 어느정도 검증된 무기가 필요했다. 기본인 웃음을 만들어내는 능력. 이미 여러 예능프로그램에서 검증된 에능인을 삼고초려 끝에 섭외. 우리한테는 강호동이라는 양반이 있잖아)이라는 새로운 인물들이 새 식구로 들어왔다. 비극의 한가운데, 진짜 희극은 그렇게 탄생했다.

 

 

<1박 2일>을 진행하며 배운 가장 큰 교훈

메인PD였던 이명한PD가 특단의 결정을 내렸던 게 주효했다. '원점으로 돌아가자. 급보다는 가능성을 보고 섭외하자'고. 비슷한 느낌의 대체재가 아니라, 원석을 발굴하자는 거. 원석이 다이아몬드로 거듭나기만 하면 그 폭발력이 엄청나지만, 그 일반론. 일반론을 모르는 사람이 어딨겠는가. 다만 알면서도 실행에 옮기기가 어려운 게 일반론의 함정이다. 사람들은 더 쉬운 길, 더 확실한 길을 찾는다. 

 

기존에 평가가 어떤지, 얼마나 성과를 냈는지, 히트친 프로젝트가 얼마나 있는지, 지금 얼마나 인기가 있는지, 이런 게 더 중요할 때가 많다. 가능성이라는 항목은 맨 뒤로 밀리는 경우가 허다한 거다. 내가 <1박 2일>을 5년 간 진행하며 배운 가장 큰 교훈은 '일반론을 따르라'는 것이다. 정석대로, 원칙대로 하면 예상외로 길이 열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걸 믿고 가보자. 어쩌면 겁 없는 결정이었다. 

 

나중에 불평 없이 꿋꿋한 호동이 형이 신기해서, 한번 물어본 적이 있었다. 어떻게 버텼냐고. 우리가 결국 잘 될 줄 알았냐고. '선수는 운동만 열심히 하면 되는 거지. 나머지는 감독이 알아서 하는 거 아닙니까.' 운동선수 출신다운 명언 아닌가. 한마디로 프로페셔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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