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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探求】 한 숨에 훑어보는 일본역사 본문
일본 역사는 길고 매혹적이고, 많은 기록이 있다.
이번에 한번 간략하게 살펴보자.
칭호나 이름은 가능한 그 나라의 방식을 따랐다.
글만 썼었는데 사진도 보니 더 좋아서, 추가했다.
#초기문화#
일본인이 어디서 왔는지 권위를 갖고 말할 수 있는 인물은 아직 없다.
중앙아시아의 몽고인과 친척 관계라는 혹자도, 동남아시아나 폴리네시아 사람들과 관련이 있다는 혹자도 있다.
어쨌거나 환태평양의 다양한 민족과 문화가 결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최초의 토착민은 석기시대 중기(5k년 ~ 12k년 전)의 유목민족인 조몬족이었다.
이후 벼를 경작하고, 토기를 만들고
철기와 청동기를 제작한 청동기와 철기 시대(1.7k년 ~ 2.3k년 전)의 야요이 족이 일본에 와서 정착했다.
그 이후 고훈 시대(1.7k년 전부터 약 400여년간)에는
일본의 영토 절반 이상이 통일된 왕국으로 모습을 갖춰가기 시작했다
## 중국의 영향 ##
아스카 시대(538년부터 100여년)와 나라시대(710년부터 80여년),
당시 중국은 세계적인 제국이었지만, 일본은 막 문명이 싹트던 때였다.
여행자나 공식 파견단들이 두 나라를 오가며 불교와 중국의 기술과 달력을 일본에 전했다.
중국의 영향력은 일본이 한자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나, 양국이 공유하는 요리법, 예술, 역사에서도 잘 드러난다.
한국에서는 백제가 쇼토쿠 태자를 통해 물려준 유산에 관심이 많지만,
사실 그 유산도 중국에서 유래된 걸 생각해보면...
어쨌든
21세기에도 중국과 일본 두 나라 사이에는 여전히 서로에 대한 존경심과 동시에 강한 불신도 남아 있어서,
좀처럼 해결되지 않는 불편한 역학관계도 있다.
## 내전 ##
#헤이안 시대를 끝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가마쿠라 막부 내의 권력투쟁
#이어지는 농민봉기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와의 교역
#교역을 봉쇄시킨 도쿠가와의 등장
그로부터 수백 년이 지나, 일본인들은 일련의 내전에 휘말린다.
9세기 일본 고전예술이 꽃피었던 헤이안 시대의 약 200년이 지난 후
야심찬 리더와 가문들로 인해 격동기에 접어들었다.
10년 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는 고토바 천황(後鳥羽天皇)을 무시하고 가마쿠라에 군사정권을 세웠다.
천황은 그를 최고 군사지도자인 쇼군(将軍)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그 후 130년 가까이 귀족 가문과 궁중이 지속적인 권력투쟁을 벌이면서 배신과 폭력이 난무했고,
농노들이 억압적인 영주에 대항해 봉기를 일으키면서 계급간 충돌도 발생했다.
한편, 1274년.
몽고 제국의 쿠빌라이 칸이 일본 침략을 시도하던 중 전설적인 사건이 발생했는데,
1차 침략 때 태풍이 불어 몽고군 함대를 거의 전몰시키고,
7년 뒤인 2차 침략 때에도 ‘신성한 바람(神風)’이 몽고군을 다수 침몰시켰던 일로 자주 언급되곤 한다.
일본 내전 후반부에는 유럽인이 큐슈에 도착했다.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인들이 나가사키를 중심으로 일본인과 교역을 시작했고, 총기와 기독교를 들여왔다.
실용주의적인 태도로 종교는 거부했지만, 무기는 받아들이게 된다.
나중에 도쿠가와 이에야스 쇼군은 기독교를 권력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여서 기독교 활동을 전면 금지했다.
더불어 외국인을 축출하고, 사실상 서양과의 교역도 중단하면서 일본은 고립되게 된다.
## 도쿠가와와 에도 시대 ##
#무사에서 상인으로
#문화부흥과 도시화
#페리제독의 에도 개항
#메이지천황을 추대한 개혁세력 등장
도쿠가와와 그 계승자들이 권력을 잡으면서, 일본은 에도 시대에 접어든다.
이후 수백 년에 걸쳐서 실권은 점차 무사계급에서 상인계급으로 넘어갔다.
미술, 문학, 극예술이 커지는 동시에 도시화가 이뤄진 시기다.
하지만, 여전히 쇼군이 사람들에게 강력한 통제력을 행사했기 때문에 정치적인 큰 변화는 없었다.
그렇게 1853년.
미국 매튜 페리(Matthew C. Perry) 제독이 일본을 개항시키는 임무를 띠고 ‘흑선함대’를 이끌고 에도 만에 도착한다.
이후 15년에 걸쳐 도쿠가와・에도 막부는 몰락했다.
이때 개혁적 성향의 사람들이 젊은 메이지 천황을 추대해 ‘혈통’이 명분이 된 구심점을 삼아 국가적 변혁을 단행한다.
이렇게 일본의 근대가 시작됐다.
## 메이지 유신 ##
지도자들은 ‘일본의 전통을 버리고 구미를 모방해야 한다’고 뜻을 모은다.
봉건제도가 폐지되고, 국가 차원의 군대가 창설되고, 철도가 부설되고, ‘메이지헌법’이 제정되었다.
정당이 우후죽순 생겨났고, 경제 지도층이 디플레정책을 추구해 경기과열을 강하게 통제했다.
이 시대에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이라는 2개의 큰 전쟁이 있었는데, 일본은 모두 승리했다.
일련의 전쟁과 침탈의 결과 중 하나가 1910년 한일 병탄이었다.
## 다이쇼 민주주의 ##
1920년대와 1930년대 초는 다이쇼 천황의 통치기간과 겹치는 ‘다이쇼 데모크라시’로 알려져있다.
여성이 직업을 가질 기회가 열렸고, 젊은이들이 연애결혼을 하기 시작했고,
유럽식 옷차림과 오락이 평범한 사람들의 삶 속으로 스며들었다.
반대편에서는 이런 소비문화와 과시풍조에 불만을 갖고, 다른 나라의 보호주의적 이민 및 경제정책에 좌절감을 느낀 우익집단이 정치력을 갖기 시작했다.
총리와 자유주의적 지도자들이 연속으로 암살당했고, 군이 문민정부보다 더 큰 통제력을 행사했다.
## 2차 세계대전 ##
1931년 일본은 중국을 공격해 만주국이라는 괴뢰국을 세웠다.
1937년 베이징 근처 마르코폴로 다리에서 중국 수비대와 충돌하며 중국과의 전쟁이 확대됐다.
일본은 효과적으로 전투했지만, 끝없는 중국의 인력과 영토로 인해 전쟁을 쉽게 끝내지 못했다.
한편 미국은 중국에 대해 강한 지지를 표명하면서, 일본으로의 전쟁물자 공급을 거부했다.
결국 1941년 일본은 적대적인 미국에 맞서 마닐라와 말레이(현재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 홍콩, 괌, 웨이크 섬, 하와이의 진주만을 공격했다.
일본은 필리핀을 획득해 마침내 이익을 확보했지만, 이상의 진전은 없었다.
연합군의 역공으로 1945년 거의 매일 일본에 폭격을 가했다.
그 중 유명한 사건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원자폭탄 투하다.
쇼와 천황은 전쟁초반의 성공과 원로의 기세에 전쟁을 지지했지만
전쟁 막바지에는 신민이 고통스러워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당시 정부가 항복문제로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것을 알아챈 천황은 전통을 깨고, 정부에 의견을 제시하며 일본이 전쟁을 즉시 포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1945년 8월 15일 쇼와 천황은 국영라디오연설에서 신민들에게 패배를 받아들일 것을 요청하며 항복했다.
## 연합군 점령기 ##
직후 미국 맥아더 장군의 지휘로 연합군이 일본을 점령했다.
일본을 민주주의국가로 만들기 목적으로 전쟁 이전의 기업을 해체하고, 대대적으로 토지개혁을 시행하고, 일본의 교전권을 영구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내용을 담은 ‘평화헌법’을 제정했다.
처음엔 여성인권이 극적으로 개선되고, 노조가 생기는 등 평화적이고 평등주의적인 사회가 건설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미소냉전 중이던 당시
미국은 일본이 주변국을 침략할 위험성보다, 극동지역에서 일본이 자국의 지원군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을 읽은 보수적인 자본가 세력이 좌파로부터 정부 통제권을 가져가기 시작해, 오늘날까지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
## 경제 소생 ##
연합군 점령은 1952년에 곧 끝났다.
평화헌법으로 국방비 부담에서 자유로워진 일본은 오로지 경제성장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이후 급속도로 성장해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 되었다.
1960년대 카메라, 자동차, 오토바이가 해외시장을 점유하기 시작해
1970년대 점유율이 크게 확대된 것은 물론, 조선, 전자제품, 내구재까지 대열에 합류했다.
다른 국가의 경쟁업체는 경쟁에서 밀려나 시장에서 쪼그라들거나 사라져버렸다.
1970년대가 끝날 무렵 일본은 미국을 넘어설 1인자로 떠올랐다.
이건 곧 서구 사회와의 끝없는 무역마찰의 신호탄이었다.
하지만, 우선 일본은 더 많은 생산시설을 해외에 짓기 시작해, 수출과 관련한 문제를 피했다.
둘째로, 해외에서 돈을 번 일본기업들이 엔화 환전을 억제해 엔화의 평가절상 압력을 막았다.
일본은행이 대출 완화까지 가세하자, 일본인들은 원하는 것은 어느 것이든 살 수 있는 충분한 돈을 구할 수 있게 됐다.
더 좋고 더 비싼 것에 대한 요구가 커지면서, 유명 디자이너 제품이 호황을 누렸고,
해외여행을 가는 일본인이 크게 증가했다.
한편 주주에게 배당금을 지불할 부담이 없는 주식시장은 1989년까지 상승해
닛케이 지수는 사상 최대인 38915.87을 기록했다.
그러나
호황은 오래가지 못했고, 2002년 10월 닛케이 지수는 8200선 밑까지 떨어졌다.
고작 10여년 새, 나라의 자산가치가 거의 80% 증발한 셈이다.
## 잃어버린 10년 ##
거품이 꺼지면서 일본 경제는 만성적인 침체 상태에 빠졌다.
1995년까지 엔화가 급속하게 평가절상돼 1달러에 85엔 수준까지 오르며, 일본의 수출실적은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기업은 많은 해외투자에 실패했고, 완화된 대출조건에 현혹되어 무리하게 비용을 지불해왔다는 것을 깨달은 후는 이미 늦어 있었다.
20여년전까지만 해도 칭송받던 일본식 경영방식은 거추장스럽고 비용이 큰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고령자 증가는 안 그래도 적자였던 의료보건제도에 압력을 키웠다.
정치 지도자들의 정치력 또한 지지부진해 재정적자는 GDP의 150% 수준까지 치솟았고, 일본의 신용등급은 추락했다.
계속되는 경기침체로 청년들은 대학을 졸업해도 취업을 하지 못해 부모에게 의지해야 했다.
대기업을 포함해 많은 기업들이 직원을 여러 명분으로 정리했다.
가계 소득은 떨어지고, 많은 가정이 생계유지를 위해 고금리 대출에도 의지하게 됐다.
범죄율이 증가하고, 자살률도 치솟았고, 더 나아지지 않을 거란 우울심리도 만연해졌다.
하지만 다시 00년대 후반부터는 다시 안정적으로 경기회복세를 보여,
현재 일본경제는 명목 GDP기준 미국(20조 달러), 중국(13조 달러)에 이은 세계 3위(5조 달러)이다.
그러나 여전히 인구감소로 인한 구조적인 어려움에 직면해 있고, GDP대비 부채는 235%로 세계에서 가장 높다.
(참고로, 한국의 보수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포퓰리즘으로 망한 국가’로
자주 입에 올리는 '베네수엘라'의 GDP대비 부채비율이 215%다.)
버블붕괴, 동일본 대지진을 겪었던 헤이세이 시대(1989년 ~ 2019년)를 지나
현재는 레이와 시대(2019년~)에 접어 들어있다.
🥞 참조 문헌
A Brief History of Japan | japanistry.com
A brief history of Japan in five distinct historical periods. The summary hopefully provides a basic insight into…
www.japanistry.com
History of Japan - Wikipedia
Aspect of history The first human inhabitation in the Japanese archipelago has been traced to prehistoric times around 30,000 BCE. The Jōmon period, named after its cord-marked pottery, was followed by the Yayoi people in the first millennium BCE when new
en.wikipedia.org
「ひらがな」の成り立ちを知っていますか?日本語に「ひらがな」と「カタカナ」がある理由
子どものころから慣れ親しんできた「ひらがな」。ひらがなを読むことは簡単にできますが、ひらがなの成り立ちについて説明できる方は少ない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ひらがなはいつから
fundo.jp
세계를 읽다, 일본
현지의 삶과 사람에 초점을 맞춘 본격 세계문화 안내서 <세계를 읽다> 시리즈.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의 역사와 문화, 일본인의 삶에 대해 타자적 시선으로 마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www.alad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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